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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저자 : 켄트 필폿
출판사 : 규장

출판사 규장에서 번역 출간한 "진실로 회심했는가"는  켄트 필폿이라는 목사님이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회심하지 않았는데 회심했다고 착각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교회 다닌다고, 영접기도 따라 했다고 다 거듭난 건 아니란 말입니다. 자신은 거듭났다고 잘못 알고 태평하게 사는 이들을 향한 안타까운 주님의 마음을 이 책음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16-20]

 

[들어가는 글]
회심은 인생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

10년 전, 나는 회심(回心)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때까지 29년 동안 목회하면서 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사실 그때까지는 회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意志)로 회개하고 예수를 주(主, Lord)와 구주(救主, Savior)로 믿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다’라고 믿었던 것이다. 나는 일찍이 이런 식의 전도 공식을 배웠고, 이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내게 “선택이나 결심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 있다고 믿습니까?”라고 진지하게 물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 정말 있다고 믿는 복음주의자들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런 견해는 성경의 신학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자유의지(自由意志)의 역할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 당신에게 묻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결정(결심)하는 것이 회심과 동일한 것인가? 우리는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계시해주셔야 회개와 믿음이 가능하다는 것도 잘 안다. 사실, 복음주의자 대부분은 ‘구원의 은혜’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중생(重生, 거듭남)이 오직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온다고 믿는다. 나 역시 복음주의자로서 이렇게 믿었다. 하지만 나의 실제 전도 방법은 내 신학과 달랐다.

 

회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낳으신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선택을 한 것 같지만, 실제로 회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구원이 오직 인간의 결단이나 선택의 문제라고 보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오해하는 것이고, 그것을 잘못 전하는 것이다.

 

놀라운 발견
1994년, 나는 미국에서 일어났던 대각성운동들의 역사를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 내려가던 중 내 눈길을 사로잡아 나를 얼어붙게 만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1820년대에 아사헬 네틀톤(Asahel Nettleton, 1783~1844. 대각성운동 중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신학자이자 목회자)과 찰스 피니(Charles Finney, 1792~1875. 19세기 초 미국에서 부흥 운동을 이끈 중심인물 중 한 사람)가 벌인 ‘방법론 논쟁’이었다. 

 

찰스 피니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절차, 수단, 방책)이라는 것을 사용했다. 여기에는 소위 ‘제단으로의 부름’(the alter call, 사람들을 설교단 앞으로 불러내는 것)과 그들로 하여금 ‘영접기도’를 드리게 하는 것이 포함되었다(사실, 지금도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네틀톤은 이런 방법이 성경의 방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시하고 성령께서 사람을 회심시키시도록 의지하는 것이 성경의 방법이다. 그는 피니가 사용하는 방법이 결국에는 잘못된 회심의 고백을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네틀톤의 견해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처럼 나도 비성경적인 전도 방법은 실상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지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여러 해에 걸친 내 목회 기간 동안에,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이 나중에 보니까 그렇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전부터 나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실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앉아 있었다는 말인가? 자신들이 천국으로 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앉아 있었다는 말인가?

 

‘거짓 회심’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내게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나는 왜 그전에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내가 30년 목회를 제대로 한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새로운 사실에 눈뜬 나는 기독교의 회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고민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이 책이다.

 

중대한 방향 전환
1963년 캘리포니아 주(州)에 있는 페어필드제일침례교회에서 로버트 루이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나는 사실상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 네덜란드의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신학 사상으로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할 수 있다고 본다)의 입장에 선 복음주의자가 되었다. 내가 말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칼빈주의(Calvinism, 종교개혁가 칼빈의 사상을 따르는 신학 사상으로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예정론을 믿는다)를 배격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나는 칼빈주의, 즉 개혁신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칼빈주의 신학은 흔히 ‘개혁신학’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람들을 칼빈주의자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 내 얘기의 초점은 ‘회심이 무엇이냐’이다. 회심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이든 개혁신학 신봉자이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중요한 문제이다).

 

페어필드의 교회는 네틀톤이 피니와 논쟁을 벌이는 중에 반대했던 전도 방법을 사용하는 교회였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 전도 방법을 받아들였다. 그 후, 그러니까 1968년부터 1980년까지 나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전통에 서서 사역을 하는 복음주의자’였다. 1980년 이후에도 복음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을 계속 붙들었다. 그러다가 1997년이 되었을 때 나는 개혁신학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나의 신학적 여정을 간단히 언급한 이유는 오직 내가 복음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의 주류(主流)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내가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사역을 했던 시기에 거짓 회심들이 가장 많이 나타났다. 다시 말해서, 그 이전이나 이후보다 더 많이 나타났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할지라도,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자신이 회심했다고 착각하는 일은 앞으로도 항상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돕는 ‘방법’(테크닉)을 사용하는 것이나 이런저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영적인 현상들을 회심의 징후(徵候)로 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내가 발견한 성경의 회심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의 변화 없이 ‘방법’(테크닉)만을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런저런 영적 현상들을 흉내 내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는 통상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거짓 회심을 낳을 수도 있다고 믿게 된 후로 사역의 방법을 바꾸기 시작했다.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를 강하게 한 후에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분은 손을 들고 앞으로 나오십시오”라고 말하는 방법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설교는 전과 똑같이 하지만 ‘영접으로의 초대’(결신의 초청)를 하지 않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영접으로의 초대’를 하지 않는 것에 점차적으로 익숙해져갔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그들의 주(主, Lord)와 구주(救主, Savior)로 믿으라고 촉구하는 것은 계속했다. 내가 포기한 것은 내 설교를 마친 후에 그들을 조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설교 후에 그들에게 강단 앞으로 나와서 영접기도를 따라 하도록 시키는 것을 포기했다는 말이다. 나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교인들이 다소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들의 비판을 무시하지 않고 나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일깨워주시고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계시해주시기를 의지하는 방법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제안이 내게 던져졌고, 나는 그것을 꽤 깊이 생각해보았다. 그 제안은 이런 것이었다.

 
“그물을 넓게 던지십시오. 다시 말해서, 온갖 전도 방법을 다 사용하여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교회로 모이게 한 다음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루도록 하십시오. 최근에 유행하는 예배 형식들을 도입하고, 사람들을 결신(決信)으로 이끌고, 기독교가 아주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며,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각종 프로그램을 활용하십시오. 이런 방법들을 사용하여 불러 모은 사람들이 회심하지 못한다 해도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들이 교회에 계속 출석한다면 복음을 계속 들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그들 중 회심자가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에 전혀 나오지 않는 것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기독교와 계속 접촉하도록 만드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나는 이런 논리에 설득될 뻔했다. 아무튼 나는 재판관도 아니고 배심원도 아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떤 방법이라도 사용하실 것이다. 사실, 나도 사람들을 결신으로 이끄는 데 효과적인 것으로 보이는 방법들을 여러 해 동안 사용해보았다. 그러나 거짓 회심의 큰 위험성을 깨닫게 된 후로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시도록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했으며, 사람들을 회심으로 이끈다는 명분으로 비성경적인 방법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게 되었다.

 
‘복음의 거치는 것’을 제거하자?
우리는 전도할 때 ‘십자가의 거치는 것’(the offense of the cross, 갈 5:11)을 피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선포하는 것은 ‘거치는 것’(offense, 걸림돌)이다. 우리 인간은 주도권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고 선택하고 구원하신다”라는 말을 들으면 불쾌감을 느낀다.

 
만일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전하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전했다면, 그는 그의 반대자들과 충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갈 5:11)라고 말했다.

 
만일 바울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할례도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구원의 유일한 수단으로 믿는 신앙이 훼손되었을 것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주장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라는 진리를 훼손한다. 이런 주장이 득세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할례를 받거나, 세례를 받거나, 기도를 하거나, 교회에 등록하거나, 행동을 바꾸거나, 이런저런 갖가지 교리들에 지적(知的)으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가 ‘행하는 것’(행위)이지 구주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것’(믿음)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거짓 회심의 큰 위험성을 깨닫기 전까지 바로 이런 행위를 가르쳤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나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것, 기독교적인 것을 행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것을 행하면서 자기들이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생각했다.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전하는 이유
회심으로 이끈다는 비성경적인 방법들을 사용하지 않은 처음 2,3년 동안은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가시적(可視的) 증거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설교할 때 복음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고, 예수님과 십자가를 최대한 강하게 부각시켰으며, 성령님이 사람들을 회심시키시도록 그분을 의지했다. 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설교했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찾아 주와 구주로 믿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라는 요청에 사람들이 손을 들거나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게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신(決信)하는 사람의 수를 확인할 수 없어서 내 사역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때때로 나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옛날 습관으로 되돌아가 설교 후에 사람들에게 결신의 표시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 대개는 사람들이 반응을 보였다. 때로는 과거에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이 다시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또 다른 사람들도 반응을 보였는데, 그들은 내가 볼 때 예수님의 제자의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나는 계속 분명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고, 설교 후에는 기도하거나 찬송을 불렀으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 능력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앞의 이야기에서 당신은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선택)를 전했으며, 또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어야 한다고 전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둘은 서로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둘을 모두 붙든다. C. H. 스펄전(1834~1892.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로서 ‘설교의 황제’라고 불렸다)이 19세기 후반에 그랬듯이 말이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스펄전이 회개와 믿음의 필요성을 전한다고 비판했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그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설교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성경이 이 두 가지를 모두 가르치기 때문에 자기도 이 두 가지를 모두 전한다고 말했다. 나도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나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행위에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령님이 모든 것을 이루셔야 한다. 회개에서 믿음까지 말이다[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 더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안 머레이의 책 《스펄전과 극단적 칼빈주의》(Spurgeon v. Hyper-Calvinism)를 권한다].

 

내 사역의 고무적인 결과들이 여기저기에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인들은 교회에서, 집에서, 승용차 안에서, 또는 직장에서 회심했다. 자신들의 거듭남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직접적인 고백으로, 어떤 사람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믿음을 나타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서 일하시는 것을 볼 때 정말로 감사했다!

 

회심은 언제나 신비이다
아직도 회심은 내게 신비로운 것이다.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교회들에서 거짓 회심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1998년에 이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 대한 반응이 편지, 전화, 또는 이메일을 통해 전 세계로부터 왔다(저자는 이 ‘들어가는 글’을 이 책의 재판 때 새로 썼다. 그래서 초판과 재판 사이에 독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었다 - 역자 주). 연락해온 사람들은 대부분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전통에 서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의 반응을 접한 후 나는 거짓 회심의 문제가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메일을 통해 온 전형적인 반응은 이런 것들이다.
“어찌하여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지를 이제 알겠습니다.”
“내가 아는 아무개가 신자가 아닐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적인 것들에 최소한의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그런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거짓 회심이라는 지극히 심각한 문제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몇 번에 걸쳐 사람들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장 많이 접했던 반응은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하고 궁금했지만, 모든 사람들은 계속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라는 식의 이야기였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도 깜짝 놀랄 정도로 예상치 못하게 회심이 찾아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책은 어떤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안겨주기도 했다. 거짓 회심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내 입장에 동의하는 몇몇 목회자들과 그들의 교인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루터파에 속한 어떤 목사는 율법과 복음에 대해 많이 설교했지만, 회심하지 못한 많은 교인들이 그의 그런 설교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몇몇 교인들이 회심했고, 그 목사는 자기가 배척당하긴 했어도 옳은 일을 했다고 믿었다. 싱가포르에 있는 한 독립파 성경교회에서 목회하던 또 다른 목사는 교인들이 자꾸 줄어들었기 때문에 결국 낙심하여 교회를 사임했다(이 목사와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또 있었다). 반면, 내가 잘 아는 교회를 맡고 있는 목회자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만일 당신의 교회에서 몇 차례 설교한다면, 당신의 교인들 중 상당수는 자기들이 회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즉시 “당신은 내 교회에서 설교하지 마십시오”라고 응답했다.

 
이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단지 사람들을 불러 모아 교회의 좌석을 채우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나 교인이 예수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라는 말씀을 듣도록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가? 혹시 우리는 그들이 그분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는 말씀을 듣도록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영원한 운명을 가르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현실의 문제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지금 정말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계속 밀고 나갈 수 있도록 용기를 준 말씀은 이것이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 2:15,16

 

생사가 달린 문제

빠르고 손쉬운 인간적 방법을 사용하여 의심스러운 회심의 고백을 얻어낼 바에는 차라리 조롱당하고 쫓겨날 각오를 하고 회심을 주제로 설교하겠다는 것이 나의 자세이다. 내가 볼 때, 우리 자신의 회심과 다른 사람들의 회심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어느 쪽의 답을 얻든 우리에게 이롭다. 만약 우리가 회심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더 큰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회심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께 나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에 했던 회심의 고백이 엉터리였는데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큰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회심의 가능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강조했듯이, 회심의 문제는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사망이냐의 문제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전하는 설교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많은 목회자나 설교자는 말했다가는 자기들이 쫓겨날 수도 있는 설교를 기피하게 된다. 목회자나 설교자의 이런 태도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나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들은 널리 쓰이는 전도 방법을 계속 사용하여 새신자를 자꾸 등록시키라는 압력이 교단, 교회회의, 또는 당회로부터 자기들에게 가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십자가 설교를 전하고 그런 모습을 보게 되는 설교자는 낙심하고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나도 그런 일을 겪었다. 내가 기존의 다양한 전도 테크닉을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 성령께서 사람들을 회심시키시도록 의지하는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내게는 전도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런 비난이 두려운 목회자들은 문제가 있는 전도 방법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길 수 있다. 우리는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를 보면, 처음에는 잘 안 되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에서 참된 회심과 비슷한 것이 있었는지를 잘 조사해보도록 돕는 데 익숙해졌다. 이렇게 하면 피차 거북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진실로 회심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내가 볼 때, 이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에 변화가 와서 자기들이 정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힘쓰는 것 같다. 나는 이 책이 날카롭고 명확하고 강력한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이 우리 구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힘쓰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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